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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경제] 1장 – 홍콩의 발전 역사

본 포스트는 홍콩과학기술대학교 경제학부의 Francis Lui 교수님의 The Hong Kong Economy의 강의내용에서 발췌 한 것임을 밝힙니다.

1장 – 홍콩 경제의 역사

홍콩은 현재까지 자유시장주의를 지지하고 법과 질서를 지키며 지적 재산권을 존중하며 균형잡힌 재정상태를 유지하는 정부의 역할로 인하여 장족의 발전을 이루어왔다. 그리고 홍콩의 역사를 들여다 보는 것은 현재의 홍콩이 있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알아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1.1. 아편전쟁 이후의 홍콩 (1984)

Acemoglu, Daron, Simon Johnson and James A. Robinson (2001) 의 연구:

“The Colonial Origins of Comparative Development: An Empirical Investigation,” American Economic Review, vol. 91, number 5, p. 1639-1401

  • 19세기경 유럽인들은 그들의 식민지에 각기 다른 식민지정책과 제도를 도입했다.
  • 상대적으로 안좋은 정책이 도입된 식민지들은 낮은 소득증가로 이어졌다.
  • 유럽인들은 환경이 척박한 식민지들에게는 정착을 위한 정책보다는 단기간에 착취하고 철수할 수 있는 정책을 도입했다.
  • 그리고 대부분이 지리적 이점에 있거나 살기 좋은 환경의 식민지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좋은 시스템을 도입하여 장기적인 성장을 도모할 인센티브가 높았다.

초기 홍콩은 영국인들에게 매력적인 식민지가 아니었다.:

  • 아편전쟁 이후 당대 영국의 외무부 장관인 Lord Henry Temple Palmerston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1841년 4월 21일 그가 쓴 성명서에서 홍콩은 “a barren island with hardly a house upon it”, “집 몇채 있지 않은 척박한 섬” 이라 서술했다.
  • 1841년 1월 20일 천비조약 (Treaty of Chuenpi, 穿鼻)이후 홍콩섬은 영국의 지배아래 들어갔다. 당시 Palmerston은 홍콩섬을 식민지로 두기보다는 아편을 팔기위한 무역협정을 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이 소식을 반기지는 않았다.
  • 그리고 Palmerston은 홍콩지배를 지지했던 당시 영국정부의 대중국 최고무역사무관이었던 Captain Charles Elliott을 크게 꾸짖었고 얼마지나지 않아 그 자리는 1842년 8월 29일 만주정부와 난징조약(Treaty of Nanking )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Henry Potttinger로 교체 된다.
  • Palmerston은 1841년 Lord George Hamilton Gordon Aberdeen의 후임이었는데 그의 선임인 Lord Aberdeen은 홍콩지배의 대해 Palmerston보다 더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1. 빅토리아시대의 당시 영국은 자유무역주의를 원칙으로 삼았다. 따라서 중국의 땅을 점령하는 것보다는 무역 조약을 맽는 것을 더 중시했다.
    2.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하는데는 비용이 들어간다.
    3. 당시 영국은 동중국해에 위치한 주산도(Zhoushan Island, 舟山)를 더 선호했다. (상해와의 활발한 무역을 위하여)
  • 하지만 중요한건 Palmerston과 Aberdeen은 홍콩을 방문하지 않은채 위와 같은 판단을 내렸고 반면 홍콩을 직접 방문했던 Elliott과 Pottinger는 홍콩의 천연항구로서의 가치를 알아보았고 이에 따라 홍콩을 장기적인 안목으로 키워야할 식민지로 판단했다.

1.2. 아편전쟁 이전의 홍콩

  • 영국의 식민지 지배자들은 지배당시 홍콩을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버려진 섬’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홍콩원주민의 인구수는 약 5,650 ~ 8,000명 정도 될것이라 추정되었다.
    (스탠리, Stanley, [홍콩섬의 남쪽방면에 위치한 동네]의 경우 당시 180대의 집들과 350척의 고깃배들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구룡시, Kowloon City,에 위치한 후왕사(Hou Wang Temple, 侯王廟)에는 1822년 당시 100곳이 넘는 상점들과 기업들이 이 사원의 개선공사를 위해서 투자한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 있다.)
  • 이는 영국이 점령하기 전 홍콩은 이미 어느정도 규모의 경제를 갖추고 있는 도시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 6000년 전 신석기시대부터 홍콩은 황하문명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3500년 전 고대 월족 (Yue,越, People)이 이주하면서 성장했다. 이들은 주로 사냥과 어업으로 주생계를 유지했고 농업을 통하여 부족한 식량을 공급했다.
  • 홍콩이 공식적으로 중국에 편입된 건 기원전 214년 진나라의 첫 황제 진시황은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제국을 세개의 지방으로 나누고 이를 다스리는 세명의 원수를 임명한다. 그 중 하나의 지방인 영남(嶺南, 산의 남쪽을 뜻함)의 남해군(南海郡, Nanhai Prefecture)의 속하게 된다.
  • 1955년 한나라시대의 고묘가 선수이부구(Sham Shui Po)의 이정옥촌(Lei Cheng Uk Village, 李鄭屋村)에서 발굴되었다. 그리고 고묘의 벽돌에는 번우대길(Daji Panyu, 大吉番禺)과 번우대치력(Panyu Dazhili, 番禺大治曆)이라고 쓰여있었다. 이는 홍콩이 오랬동안 광동의 번우현의 속해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이 고묘는 당대 소금을 관장하는 관리의 묘로 추정되며 당대 소금을 관장하는 관리는 거의 태수와 같은 급으로 대우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 당대 소금의 생산은 매우 중요했는데 이는 당대 정부가 생산권을 독점함으로서 막대한 수익을 낼 수 있는 수익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소금의 독점재로서의 역할은 한나라(25 AD – 220 AD)부터 청나라(1616 AD – 1921 AD)까지 오랜 기간동안 이어져왔다.
  • 1841년 홍콩의 영국식민지화가 선포되기 수세기 전부터 홍콩은 이미 향료(토침향, 土沉香, Aquilaria Sinensis), 소금 그리고 진주의 특산품을 가진 어업과 농업 그리고 운송업을 주로 하는 도시였다.
  • 1661년 청나라 정부는 대만을 개척한 정성공(鄭成功, General Zheng Cheng Gong) 장군의 공격을 막기위해 해안가의 주민들을 내륙으로 대피시키는 명령을 내렸고 이를 어기는 자들은 죽음으로 다스렸다. 이 정책을 해금(海禁, Sea Prohibition)책이라 하며 1684년에서야 종료된다.  그리고 이 23년의 기간동안 홍콩의 향료, 소금, 진주 산업은 초토화가 되었으며 홍콩거주민들은 운송, 어업, 농업에 더 의존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1.3. 영국식민지 초기 홍콩의 경제 발전

  • 영국이 홍콩을 점령한 1841년, 그들은 현재 홍콩의 국가경영시스템과 매우 유사한 시스템을 도입한다.
  • 여러 사업들이 시작되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수출입관련 사업, 운송, 선박 또는 금융권의 사업들이었다.
    영국계 은행들이 홍콩에 개점했다:
    Chartered Mercantile Bank of India, London, and China (1845)
    Agra and United Service Bank (1858)
    Standard Chartered Bank (1859)
    또한 새로이 HSBC가 홍콩에 본점을 두어 창립되었다:
    Hong Kong and Shanghai Banking Corporation (1865)
    .
    또한 타지에서 설립된 회사들이 본사를 홍콩으로 이전하기 시작했다.
    Jardine, Matheson and Co. (1832년 광동에서 설립)
    Swire (1832년 Liverpool에서 설립)
    .
    또한 당대 아시아 최대의 선박회사인 The Hong Kong and Whampoa Dock은 1863년 설립되었다.
  • 1841년 홍콩이 영국의 식민지로 선포된 후 얼마지나지 않아 1843년 영국정부는 홍콩이 자유항임을 선포한다.
    또한 1860년 부터 공식적인 경제정책으로 자유시장주의를 도입한다.
  • 이 정책으로 인하여 홍콩은 운송과 국제무역이 발달하기 좋은 조건을 갖추게 된다. (위의 조건과 함께 홍콩은 지리적으로 항구가 되기 유리한 조건인데 이는 주변에 작은 섬들이 많아 홍콩섬 내부의 파도는 비교적 잠잠한 편이며 조수간만의 차이 또한 크지 않다.)
  • 19세기 중반 영국계 기업인 Jardine, Matheson and Co.은 세계최대의 아편 밀수 및 도매 기업이었다. 당시엔 아편의 거래는 합법적인 것이었으나 Jardine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밀수를 더 선호했다.
  • 또한 중국출신의 막노동자(Coolies) 공급 사업은 급부상하는 사업이었다. (인력수출업)
    이들은 주로 미국의 캘리포니아나 호주의 새로 발견된 금광에 파견되었으며 1851년 부터 1872년동안 329,349명의 홍콩출신 막노동자들이 해외로 파견되었다.
    (내 생각: 해방이후 대한민국의 간호사와 노동자들이 독일로 파견된 것과 비슷)
  • 홍콩의 인구는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1841년 – 5,600 ~ 8,000명
    1861년 – 119,321명
    1911년 – 456,739명
  • 그리고 인구의 대부분은 중국인이었다.
    인구대비 중국인의 비율은 평균 95%정도대를 유지했다.
  • 홍콩 내 중국인의 미들맨으로서의 역할 증대
    이들은 중국과 유럽의 사업가들을 연결시켜주고 사업을 진행시켜주는 촉매제 혹은 중간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며 입지를 넓혀간다.
    또한 사업 뿐 아니라 교육, 문화, 정치에도 이들의 역할이 점점 중요해졌다.
    홍콩은 사실상 중국이 서구의 시스템을 학습할 수 있게 도와준 도구역할을 한 셈
    일례로 중국 첫 대통령이자, 현대 중국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국가주의자 쑨얏센 (Sun Yat-Sen, 孫逸仙, 쑨원) 박사가 있다.
  • 홍콩 내 중국인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사업에 뛰어들기 시작
    백화점 사업:
    Wing On (1907)
    Dah Sun (1912)
    은행 사업:
    The Bank of East Asia (1919)
  • 중국 엘리트리즘의 탄생
    19세기 중반 용굉 (Yung Wing, 容閎)은 미국 예일대를 졸업한 중국의 첫 유학생이 었으며 용굉의 노력으로 청나라 정부는 1870년대 120명의 홍콩 및 광동 출신 아이들을 차출하여 미국유학을 보내기로 했으며 이들은 추후 중국에 돌아왔을때 이들은 중국 정부의 주요 요직에서 활동하며 중국의 근대사의 큰 영향을 준 리더들이 되었다.
  • 90년대 후반 홍콩의 미들맨 역할
    식민지가 도입된 후 홍콩은 서구의 선진 문명(대개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한)과 문물을 받아들이며 빠른속도로 발전했다. 그리고 근 50~100년동안 홍콩은 많은 중국본토출신의 엘리트들이 거쳐가는 교육관문이 되었다.
    1980년대 중국이 경제개혁을 하며 선전시와 주해시를 경제특별구역으로 만들때  이들을 홍콩을 모델로 한 자치시의 형태로 만들었다.
    1980년대 초반 공업에 종사하는 홍콩의 많은 사업가들은 광저우의 진주강 근처로 기반을 옮긴다. (인건비&렌트비 때문) 이 과정에서 홍콩이 서양으로 부터 축적한 경영기술, 사업가정신 등이 중국본토로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갔다. 진주강의 공업지구의 대성공 (세계 공산품의 주생산지라는 명성)은 홍콩의 역할이 컸다.

1.4. 중국출신 사업가들의 등장

  • 1949년 이후 많은 중국의 사업가들은 본토에서 홍콩으로 이주해왔다. 그들은 다양한 기술들을 가지고 홍콩으로 이주 했으며 그들의 역할로 인하여 홍콩의 산업이 더 다양해 질 수 있었다. (직물, 플라스틱, 의류, 도자기, 금속, 전자제품 산업 등)
  • 이 산업들의 공통점은 이 산업들은 모두 **노동집약적이라는 것**이다.
  • 이들이 가능 했던 이유는 중국본토로부터 유입(이민)되어 온 값싼 노동자들의 영향이 컸다.
  • 그렇지만 이런 노동집약적 산업 내부에서도  이들의 기술은 점점 발달해갔다.
    1950년도 부터 1960년도까지 홍콩의 30%의 고용률을 자랑하며 산업을 주도했던 섬유산업의 비중은 점점 줄어들고 반면 그 보다 더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한 의류 및 제화산업의 고용비중이 점점 늘어갔다. (이렇게 기술력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홍콩 식민정부는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았다. 이는 Milton Friedman이 Free to Choose에서 주장하듯 정부주도가 아닌 시장주도로 인한 기술력의 발달로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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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콩이 지속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홍콩시민들의 소득도 점점 늘어나기 시작
  • 소득의 증가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세입자에서 주택보유자로 전환하고 싶어함
  • 이는 주택의 수요를 급격하게 늘림 –> 주택의 가격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
  • 1954년, Henry Fok, 홍콩부동산개발협회 회장은 선분양제도 (housing futures, lou hua, 楼花)를 도입
    이는 추후 부동산시장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다.
  • 1960년대 중반 부동산시장은 내수 경제의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 당시 몇몇의 기업가들이 부동산시장에 투자하기 시작했고 그 중 일부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사이 큰 수익을 경험한다.
  • 그들의 부는 기존의 영국기업들을 사들일 만큼 커졌으며 1980년대 그들은 사회적으로 악명이 높은 영국계 거대기업들을 인수한다. (Hutchison, Whampoa, Wheelock and Kowloon Wharf)
  • 이들의 대부분은 부유층 출신이 아닌 자수성가형 사업가들이었으며 이는 당시 홍콩의 높은 사회이동성을 보여준다.
  • 80년대 부동산으로 성공한 대표적인 사업가:
    이자청, Li Ka-shing, 李嘉誠
    대표 기업:
    CK Hutchison Holdings
    CK Hutchison Whampoa
    Cheung Kong (Holdings)
    A.S. Watson Group
    Watsons
    Superdrug
    The Perfume Shop
    PARKnSHOP
    TaSTE
    FUSION
    Mr. Juicy
    Sunkist
    .
    리자오지, Lee Shau Kee, 李兆基
    Henderson Land Development Co. Ltd.
    Miramar Hotel
    Hong Kong and China G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