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ly Archives: December 2015

Angus Deaton – Reason for Nobel Prize

Angus Deaton (앵거스 디턴)

Development Economist (Poverty & Inequality)

.

His Achievements

1. Measure of Poverty (가계동향조사 분석 및 창시)

Analysis of Household Surveys

Non-traded goods in poor countries are cheaper (Hair-cut, Houses…)

So, the current measure Living Standard measures can be misleading.

Originally used a common set of price:

BUT each countries have different consumption baskets.

eg) USA – Cheese consumption is HIGH    l    China – Cheese consumption is LOW

He is the Designer of the Household Surveys

.

2. Permanent Income Hypothesis (PIH) (항상소득가설을 반박)

Why is Consumption so smooth?

PIH is a theory of consumption behaviour used in Demand & Consumption Analysis in macroeconomics.

Deaton was testing PIH (Deaton’s Paradox)

  1. For US, GDP has been persistently growing
  2. BUT, Consumption Volatility was a lot lower
  3. PIH suggest that IF income process is persistent,
    Consumption Volatility > Income Volatility
  • BUT Not observed in data (Quantitatively Disproved)
  • Consumption Exhibits some extra smoothness

.

3. Almost Ideal Demand System (AIDS) (준이상수요체계)

links [Int’l] [home]

Try to Estimate how people respond to change in Prices

 

[홍콩경제] 1장 – 홍콩의 발전 역사

본 포스트는 홍콩과학기술대학교 경제학부의 Francis Lui 교수님의 The Hong Kong Economy의 강의내용에서 발췌 한 것임을 밝힙니다.

1장 – 홍콩 경제의 역사

홍콩은 현재까지 자유시장주의를 지지하고 법과 질서를 지키며 지적 재산권을 존중하며 균형잡힌 재정상태를 유지하는 정부의 역할로 인하여 장족의 발전을 이루어왔다. 그리고 홍콩의 역사를 들여다 보는 것은 현재의 홍콩이 있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알아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1.1. 아편전쟁 이후의 홍콩 (1984)

Acemoglu, Daron, Simon Johnson and James A. Robinson (2001) 의 연구:

“The Colonial Origins of Comparative Development: An Empirical Investigation,” American Economic Review, vol. 91, number 5, p. 1639-1401

  • 19세기경 유럽인들은 그들의 식민지에 각기 다른 식민지정책과 제도를 도입했다.
  • 상대적으로 안좋은 정책이 도입된 식민지들은 낮은 소득증가로 이어졌다.
  • 유럽인들은 환경이 척박한 식민지들에게는 정착을 위한 정책보다는 단기간에 착취하고 철수할 수 있는 정책을 도입했다.
  • 그리고 대부분이 지리적 이점에 있거나 살기 좋은 환경의 식민지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좋은 시스템을 도입하여 장기적인 성장을 도모할 인센티브가 높았다.

초기 홍콩은 영국인들에게 매력적인 식민지가 아니었다.:

  • 아편전쟁 이후 당대 영국의 외무부 장관인 Lord Henry Temple Palmerston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1841년 4월 21일 그가 쓴 성명서에서 홍콩은 “a barren island with hardly a house upon it”, “집 몇채 있지 않은 척박한 섬” 이라 서술했다.
  • 1841년 1월 20일 천비조약 (Treaty of Chuenpi, 穿鼻)이후 홍콩섬은 영국의 지배아래 들어갔다. 당시 Palmerston은 홍콩섬을 식민지로 두기보다는 아편을 팔기위한 무역협정을 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이 소식을 반기지는 않았다.
  • 그리고 Palmerston은 홍콩지배를 지지했던 당시 영국정부의 대중국 최고무역사무관이었던 Captain Charles Elliott을 크게 꾸짖었고 얼마지나지 않아 그 자리는 1842년 8월 29일 만주정부와 난징조약(Treaty of Nanking )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Henry Potttinger로 교체 된다.
  • Palmerston은 1841년 Lord George Hamilton Gordon Aberdeen의 후임이었는데 그의 선임인 Lord Aberdeen은 홍콩지배의 대해 Palmerston보다 더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1. 빅토리아시대의 당시 영국은 자유무역주의를 원칙으로 삼았다. 따라서 중국의 땅을 점령하는 것보다는 무역 조약을 맽는 것을 더 중시했다.
    2.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하는데는 비용이 들어간다.
    3. 당시 영국은 동중국해에 위치한 주산도(Zhoushan Island, 舟山)를 더 선호했다. (상해와의 활발한 무역을 위하여)
  • 하지만 중요한건 Palmerston과 Aberdeen은 홍콩을 방문하지 않은채 위와 같은 판단을 내렸고 반면 홍콩을 직접 방문했던 Elliott과 Pottinger는 홍콩의 천연항구로서의 가치를 알아보았고 이에 따라 홍콩을 장기적인 안목으로 키워야할 식민지로 판단했다.

1.2. 아편전쟁 이전의 홍콩

  • 영국의 식민지 지배자들은 지배당시 홍콩을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버려진 섬’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홍콩원주민의 인구수는 약 5,650 ~ 8,000명 정도 될것이라 추정되었다.
    (스탠리, Stanley, [홍콩섬의 남쪽방면에 위치한 동네]의 경우 당시 180대의 집들과 350척의 고깃배들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구룡시, Kowloon City,에 위치한 후왕사(Hou Wang Temple, 侯王廟)에는 1822년 당시 100곳이 넘는 상점들과 기업들이 이 사원의 개선공사를 위해서 투자한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 있다.)
  • 이는 영국이 점령하기 전 홍콩은 이미 어느정도 규모의 경제를 갖추고 있는 도시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 6000년 전 신석기시대부터 홍콩은 황하문명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3500년 전 고대 월족 (Yue,越, People)이 이주하면서 성장했다. 이들은 주로 사냥과 어업으로 주생계를 유지했고 농업을 통하여 부족한 식량을 공급했다.
  • 홍콩이 공식적으로 중국에 편입된 건 기원전 214년 진나라의 첫 황제 진시황은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제국을 세개의 지방으로 나누고 이를 다스리는 세명의 원수를 임명한다. 그 중 하나의 지방인 영남(嶺南, 산의 남쪽을 뜻함)의 남해군(南海郡, Nanhai Prefecture)의 속하게 된다.
  • 1955년 한나라시대의 고묘가 선수이부구(Sham Shui Po)의 이정옥촌(Lei Cheng Uk Village, 李鄭屋村)에서 발굴되었다. 그리고 고묘의 벽돌에는 번우대길(Daji Panyu, 大吉番禺)과 번우대치력(Panyu Dazhili, 番禺大治曆)이라고 쓰여있었다. 이는 홍콩이 오랬동안 광동의 번우현의 속해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이 고묘는 당대 소금을 관장하는 관리의 묘로 추정되며 당대 소금을 관장하는 관리는 거의 태수와 같은 급으로 대우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 당대 소금의 생산은 매우 중요했는데 이는 당대 정부가 생산권을 독점함으로서 막대한 수익을 낼 수 있는 수익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소금의 독점재로서의 역할은 한나라(25 AD – 220 AD)부터 청나라(1616 AD – 1921 AD)까지 오랜 기간동안 이어져왔다.
  • 1841년 홍콩의 영국식민지화가 선포되기 수세기 전부터 홍콩은 이미 향료(토침향, 土沉香, Aquilaria Sinensis), 소금 그리고 진주의 특산품을 가진 어업과 농업 그리고 운송업을 주로 하는 도시였다.
  • 1661년 청나라 정부는 대만을 개척한 정성공(鄭成功, General Zheng Cheng Gong) 장군의 공격을 막기위해 해안가의 주민들을 내륙으로 대피시키는 명령을 내렸고 이를 어기는 자들은 죽음으로 다스렸다. 이 정책을 해금(海禁, Sea Prohibition)책이라 하며 1684년에서야 종료된다.  그리고 이 23년의 기간동안 홍콩의 향료, 소금, 진주 산업은 초토화가 되었으며 홍콩거주민들은 운송, 어업, 농업에 더 의존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1.3. 영국식민지 초기 홍콩의 경제 발전

  • 영국이 홍콩을 점령한 1841년, 그들은 현재 홍콩의 국가경영시스템과 매우 유사한 시스템을 도입한다.
  • 여러 사업들이 시작되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수출입관련 사업, 운송, 선박 또는 금융권의 사업들이었다.
    영국계 은행들이 홍콩에 개점했다:
    Chartered Mercantile Bank of India, London, and China (1845)
    Agra and United Service Bank (1858)
    Standard Chartered Bank (1859)
    또한 새로이 HSBC가 홍콩에 본점을 두어 창립되었다:
    Hong Kong and Shanghai Banking Corporation (1865)
    .
    또한 타지에서 설립된 회사들이 본사를 홍콩으로 이전하기 시작했다.
    Jardine, Matheson and Co. (1832년 광동에서 설립)
    Swire (1832년 Liverpool에서 설립)
    .
    또한 당대 아시아 최대의 선박회사인 The Hong Kong and Whampoa Dock은 1863년 설립되었다.
  • 1841년 홍콩이 영국의 식민지로 선포된 후 얼마지나지 않아 1843년 영국정부는 홍콩이 자유항임을 선포한다.
    또한 1860년 부터 공식적인 경제정책으로 자유시장주의를 도입한다.
  • 이 정책으로 인하여 홍콩은 운송과 국제무역이 발달하기 좋은 조건을 갖추게 된다. (위의 조건과 함께 홍콩은 지리적으로 항구가 되기 유리한 조건인데 이는 주변에 작은 섬들이 많아 홍콩섬 내부의 파도는 비교적 잠잠한 편이며 조수간만의 차이 또한 크지 않다.)
  • 19세기 중반 영국계 기업인 Jardine, Matheson and Co.은 세계최대의 아편 밀수 및 도매 기업이었다. 당시엔 아편의 거래는 합법적인 것이었으나 Jardine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밀수를 더 선호했다.
  • 또한 중국출신의 막노동자(Coolies) 공급 사업은 급부상하는 사업이었다. (인력수출업)
    이들은 주로 미국의 캘리포니아나 호주의 새로 발견된 금광에 파견되었으며 1851년 부터 1872년동안 329,349명의 홍콩출신 막노동자들이 해외로 파견되었다.
    (내 생각: 해방이후 대한민국의 간호사와 노동자들이 독일로 파견된 것과 비슷)
  • 홍콩의 인구는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1841년 – 5,600 ~ 8,000명
    1861년 – 119,321명
    1911년 – 456,739명
  • 그리고 인구의 대부분은 중국인이었다.
    인구대비 중국인의 비율은 평균 95%정도대를 유지했다.
  • 홍콩 내 중국인의 미들맨으로서의 역할 증대
    이들은 중국과 유럽의 사업가들을 연결시켜주고 사업을 진행시켜주는 촉매제 혹은 중간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며 입지를 넓혀간다.
    또한 사업 뿐 아니라 교육, 문화, 정치에도 이들의 역할이 점점 중요해졌다.
    홍콩은 사실상 중국이 서구의 시스템을 학습할 수 있게 도와준 도구역할을 한 셈
    일례로 중국 첫 대통령이자, 현대 중국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국가주의자 쑨얏센 (Sun Yat-Sen, 孫逸仙, 쑨원) 박사가 있다.
  • 홍콩 내 중국인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사업에 뛰어들기 시작
    백화점 사업:
    Wing On (1907)
    Dah Sun (1912)
    은행 사업:
    The Bank of East Asia (1919)
  • 중국 엘리트리즘의 탄생
    19세기 중반 용굉 (Yung Wing, 容閎)은 미국 예일대를 졸업한 중국의 첫 유학생이 었으며 용굉의 노력으로 청나라 정부는 1870년대 120명의 홍콩 및 광동 출신 아이들을 차출하여 미국유학을 보내기로 했으며 이들은 추후 중국에 돌아왔을때 이들은 중국 정부의 주요 요직에서 활동하며 중국의 근대사의 큰 영향을 준 리더들이 되었다.
  • 90년대 후반 홍콩의 미들맨 역할
    식민지가 도입된 후 홍콩은 서구의 선진 문명(대개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한)과 문물을 받아들이며 빠른속도로 발전했다. 그리고 근 50~100년동안 홍콩은 많은 중국본토출신의 엘리트들이 거쳐가는 교육관문이 되었다.
    1980년대 중국이 경제개혁을 하며 선전시와 주해시를 경제특별구역으로 만들때  이들을 홍콩을 모델로 한 자치시의 형태로 만들었다.
    1980년대 초반 공업에 종사하는 홍콩의 많은 사업가들은 광저우의 진주강 근처로 기반을 옮긴다. (인건비&렌트비 때문) 이 과정에서 홍콩이 서양으로 부터 축적한 경영기술, 사업가정신 등이 중국본토로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갔다. 진주강의 공업지구의 대성공 (세계 공산품의 주생산지라는 명성)은 홍콩의 역할이 컸다.

1.4. 중국출신 사업가들의 등장

  • 1949년 이후 많은 중국의 사업가들은 본토에서 홍콩으로 이주해왔다. 그들은 다양한 기술들을 가지고 홍콩으로 이주 했으며 그들의 역할로 인하여 홍콩의 산업이 더 다양해 질 수 있었다. (직물, 플라스틱, 의류, 도자기, 금속, 전자제품 산업 등)
  • 이 산업들의 공통점은 이 산업들은 모두 **노동집약적이라는 것**이다.
  • 이들이 가능 했던 이유는 중국본토로부터 유입(이민)되어 온 값싼 노동자들의 영향이 컸다.
  • 그렇지만 이런 노동집약적 산업 내부에서도  이들의 기술은 점점 발달해갔다.
    1950년도 부터 1960년도까지 홍콩의 30%의 고용률을 자랑하며 산업을 주도했던 섬유산업의 비중은 점점 줄어들고 반면 그 보다 더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한 의류 및 제화산업의 고용비중이 점점 늘어갔다. (이렇게 기술력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홍콩 식민정부는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았다. 이는 Milton Friedman이 Free to Choose에서 주장하듯 정부주도가 아닌 시장주도로 인한 기술력의 발달로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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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콩이 지속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홍콩시민들의 소득도 점점 늘어나기 시작
  • 소득의 증가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세입자에서 주택보유자로 전환하고 싶어함
  • 이는 주택의 수요를 급격하게 늘림 –> 주택의 가격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
  • 1954년, Henry Fok, 홍콩부동산개발협회 회장은 선분양제도 (housing futures, lou hua, 楼花)를 도입
    이는 추후 부동산시장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다.
  • 1960년대 중반 부동산시장은 내수 경제의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 당시 몇몇의 기업가들이 부동산시장에 투자하기 시작했고 그 중 일부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사이 큰 수익을 경험한다.
  • 그들의 부는 기존의 영국기업들을 사들일 만큼 커졌으며 1980년대 그들은 사회적으로 악명이 높은 영국계 거대기업들을 인수한다. (Hutchison, Whampoa, Wheelock and Kowloon Wharf)
  • 이들의 대부분은 부유층 출신이 아닌 자수성가형 사업가들이었으며 이는 당시 홍콩의 높은 사회이동성을 보여준다.
  • 80년대 부동산으로 성공한 대표적인 사업가:
    이자청, Li Ka-shing, 李嘉誠
    대표 기업:
    CK Hutchison Holdings
    CK Hutchison Whampoa
    Cheung Kong (Holdings)
    A.S. Watson Group
    Watsons
    Superdrug
    The Perfume Shop
    PARKnSHOP
    TaSTE
    FUSION
    Mr. Juicy
    Sunkist
    .
    리자오지, Lee Shau Kee, 李兆基
    Henderson Land Development Co. Ltd.
    Miramar Hotel
    Hong Kong and China Gas

KDI 국제대학원 MPP 지원 합격 리뷰

다행히도 생각보다 급하게 준비한 KDI 스쿨 Master of Public Policy (MPP) 과정에 붙었네요.

홍콩에서의 취업과 대학원을 고심중에… 취업도 좋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순수한 금융권자체는 저에게 와닫지 않는다고 할까요… 그냥 항상 머리 한켠엔 금융이란 어쨌건 타인을 속임이 (의도되었건 아니건) 있어서 그런가…

아무튼… KDI… 결국 원서마감 2주전에 지원하기를 결심했습니다… (너무 서두른바가 없진 않았으나…)

이 2주안에 여러 팀틀과 과제 그리고 잡인터뷰등이 있었어서 조금 준비하기 힘들었으나…

예전에 연세대 신상범교수님을 만났을때 대충 대학원도 생각하고 있다고 말씀드려놓은 상태이기도 하고…

예전 방학때 홍콩과기대 Liu Xuewen 교수님께 지나가면서 석사도 생각하고 있다하니 그때 흔쾌히 추천서도 써주시겠다고 하셔서 다행히 금방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1. 원서 준비의 대하여

1.1. 자기소개서, Statement of Purpose, 자소서, SoP, 지원동기서

다행히 취직준비를 위해 만들어 놓은 CV도 있었고 Cover Letter도 있었기때문에 Statement of Purpose (자기소개서, 자소서, SoP)를 작성하는건 크게 어렵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다른 대학원의 비해 KDI의 SoP는 신기하게 미리 주제를 정해주네요 4가지의 토픽으로 주제를 쓰는 거였는데요~ 예전 연세대학교 동아시아국제학부 지원할때와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조금 어려웠던건 400자의 제한이 있어서 맞추는 거였달까…

아무튼 SoP의 질문은 아래와 같았습니다:

  • Explain your most important accomplishment and explain why you think it as such.
  • Describe your research interest with regard to your career vision.
  • Describe your potential contributions to the class if you were to receive admission to the KDI School.
  • List any additional comments here.

(전 제 SoP를 공개하진 않겠습니다만… 어떤 점에 입각해서 작성했는지는 말씀드리겠습니다)

 

1.1.1. Q1

우선 첫번째 질문은 저한테는 꽤 쉬웠습니다. 제 경험을 적으면 되었거든요…

우선 저희 집안 가세가 기울어 진 후 현재까지 계속 발전 및 극복해온 경험을 썼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론 짧게 그 경험들로 하여금 난 뭘 얻었고 배웠는지를 썼습니다.

잘 쓴건 아니지만 400단어로는 충분했던 것 같네요 ㅠㅠ

 

1.1.2. Q2

두번째 질문은 우선 바로 제 커리어 비전을 제시했고 그리고 바로 제가 흥미를 가지는 연구주제를 말했습니다. 뭐 제 블로그를 보신 분이나 페친이면 대충 아시겠지만 전 사회계층간의 이동문제와 사회행복도의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 뒤 이런것에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즉 나의 경험)을 서술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시 결론을 짧게 썼죠

 

1.1.3. Q3

세번째 질문은 내가 과연 KDI 대학원의 문화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인가? 였는데요…

이건 뭐 취업 인터뷰 생각하면 나름 쉬웠던 것 같네요…

What is your strength?

Why should we hire you?

등의 질문의 대답하듯이 쓴 것 같습니다.

 

1.1.4. Q4

마지막은 뭐 자유죠 자유 ㅋ

전 개인적으로 왜 제 학점이 상대적으로 낮아보이는지 설명했고 KDI를 어떻게 알게 되었고 (KDI의 논물을 읽고 알게 되었으니…) 그 논문이 나에게 어떤걸 알려줬고 뭘 느끼게 해주었는지 간략하게 썼고… 그에 영감을 받아 현재 졸업논문을 비슷한 주제인 이런걸로 해서 써보고 있다. 그리고 이런 Relevant 한 과외활동에서 이런저런 리포트도 썼다를 쓰니 400자가 금방 끝나더라구요…

 

1.2. 기타 서류

그 외에 특별히 힘들었던건 하… 학교가 성적표던 졸업예정서던 뭐던 처리하는데 일주일의 시간이 걸려서…

시간이 촉박해서 힘들었네요

그외에 보낸 서류로는 CV도 첨가했습니다.

 


 

 

2. 인터뷰, 면접

사실 홍콩에서 공부하던 학기 중 보는 인터뷰였습니다만…

아무래도 직접 학교도 보는게 좋기도 하고 인터뷰를 할 수 있으면 얼굴보고 하는게 좋을 것 같다 싶어서 한국에 방문했습니다.

사실 2시간도 못자고 간 인터뷰인지라… 컨디션은 별로 안좋았는데…

인터뷰는… 음~ ㅎㅎㅎ 생각보다 너무 빨리 끝나서 잘한건지 못한건지 알 수가 없었네요…

기존 후기들을 읽었을땐 경제지식의 대한 질문도 하고 했다던데… 그래서 제가 읽었던 KDI논문도 한번 다 읽었고 제 CV도 한번 더 읽었고 SoP도 한번 더 읽고 갔는데… ㅎㅎㅎ

전 그런건 없었고…

  • 자기소개
  • 일 경험이 있는가?
  • 현재 학적이 어디인가?

정도가 끝이었던 것 같습니다…

ㅇ ㅅㅇ…;;;

무튼… 이것 땜에 붙었는지 떨어졌는지 인터뷰 후 감이 와야 하는데 전혀 감이 오지 않았지만…

붙었으니 뭐 다 잘된거겠죠? ㅎ

 

‘어느 산골의 외상값’ – 분석과 교훈

인터넷에 주기적으로 떠도는 ‘어느 산골의 외상값’이란 글이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행객은 실질적으로는 이 산골마을에서 아무것도 한게 없습니다. 왜냐면 이 산골마을의 모든 경제 주체들은 원래부터 빚이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죠. 다만 있다고 착각할뿐… (여행객은 이 착각을 풀 수 있게 살짝 유동성만 제공한것이지요) – 이 스토리는 여행객이 와서 모든 경제주체의 빚을 청산시켜줬다고 하는데 실상은 빚을 청산시킴과 동시에 이들의 자산인 미수금또한 청산 시켜준 것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한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 입니다.

요즘엔 메르스라는 컨셉으로 바뀌었지만 이 이야기의 유래는 ‘The Tale of the $100 bill’ 이라고 수년전부터 외국에서 유럽의 경제위기를 빚대어 미국의 연준위 밴버냉키 의장이 유럽에 100달러를 빌려줘야 한다는 주장이라던가… 유동성을 위해 통화량을 공급하고 회수하는 중앙은행의 역할이라던가를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로 알고 있습니다.

관광객을 상대하며 살아가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관광객의 발길이 뚝 끊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여행객 한 사람이 와서
민박집에 방을 잡았고 20만원의 숙박료를 선불 했습니다.

민박집 주인은 정육점으로 달려가서
고기값 20만원을 갚았습니다.

정육점 주인은 세탁소로 달려가서
세탁비 20만원을 갚았습니다.

세탁소 주인은 맥주집으로 달려가서
맥주값 20만원을 갚았습니다.

맥주집 주인은 민박집으로 달려가서
숙박비 20만원을 갚았습니다.

돈이 순식간에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돌아 다시 민박집 주인에게
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여행객이 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20만원을 돌려받고 떠나 버렸습니다.

돈을 번 사람은 아무도 없고
돈을 쓴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마을에는 이제 빚진 사람이 아무도 없어 졌습니다.

이런 훈훈한 이야기죠…

신기한가요? ^^

신기해보이지만 회계적으로 분석해 보면 그다지 신기할 것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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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객이 오기 전 상황>

여행객이 오기 전, 이 마을의 사람들은 서로에게 외상을 하여 소비를 대체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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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각 주체가 현금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여행객이 와서 현금을 주고서야 부채를 갚았다는 걸 보면 현금이 없을 가능성이 크겠죠…

자 여기서 이미 이들의 부채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Step 1.

민박집이 정육점에게 맥주집에 20만원 받을게 있으니 가서 받아가라며 부채와 자산을 청산한다.

그리고 정육점의 자산은 ‘민박집 – 미수금 20만원’에서 ‘맥주집 – 미수금 20만원’으로 바뀐다.

따라서 맥주집의 부채는 ‘민박집 – 부채 20만원’에서 ‘정육점 – 부채 20만원’으로 바뀐다.

Step 2.

이제 정육점이 세탁소에게 맥주집에 20만원 받을게 있으니 가서 받아가라며 부채와 자산을 청산한다.

그리고 세탁소의 자산은 ‘정육점 – 미수금 20만원’에서 ‘맥주집 – 미수금 20만원’으로 바뀐다.

따라서 맥주집의 부채는 ‘정육점 – 부채 20만원’에서 ‘세탁소 – 부채 20만원’으로 바뀐다.

Screen Shot 2015-12-03 at 14.10.22

위의 표는 Step 1Step 2를 보여주고 있다.

자 이제 세탁소와 맥주집이 각각 서로에게 부채와 미수금 20만원씩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서로 퉁치자! 라고 한다.

그러면 민박집, 정육점, 세탁소, 맥주집은 모두 부채가 없어지게 된다. 하지만 미수금이라는 자산도 함께 없어지는 것이다.

결국 정리하자면… 여행객이 오기전 상황에서도 이 시골마을 경제 전체를 본다면 그 어떤 부채도 자산도 없는 상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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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객의 역할>

이렇게 이 시골마을의 경제주체 4명이 서로의 미수금으로 부채를 청산할 생각을 하지 못한 상황에서 여행객의 역할은 이 시골마을에 현금의 유동성을 준 것밖에 없다.

여행객이 20만원을 민박집에 빌려줌으로서 민박집은 맥주집의 미수금으로 정육점의 부채를 갚는 대신 현금으로 갚았고… 이 현금은 돌고돌아 맥주집으로 흘러들어갔고 맥주집은 결국 또 이 현금을 민박집에게 돌려준 샘이다.

아래 표를 보자. 여기서 “여행자 – 예비금 20만원” 은 여행객이 환불을 요청하기 전, 즉 여행객이 언제 환불을 요청할지 모르니 여행객이 민박집에서 묶는다고 정하기 전 까지 민박집 주인이 준비해 놓는 일종의 부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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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아래서 두번째 단계까지가 서로에게 돈을 주고 받은 상태이고

가장 마지막 단계가 여행객이 환불을 요청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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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여행객은 이 산골마을 경제에 현금을 빌려줌으로서 산골마을 경제 내 유동성을 증가시켰고 산골마을 4경제주체들은 이 현금을 “매개체”로 이용하여 서로에게 빚을 갚았으며 마지막 여관주인에게 환불을 요청함으로서 마을에 유입한 현금을 다시 가져감으로서 유동성을 원위치 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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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요점은 원래 이 산골마을은 여행객이 오기전에도 부채는 없었다. 네 경제주체가 각기 다른 사람에게 부채가 있음으로서 정보의 불균형이 왔고 서로 부채가 있다고 믿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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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훈>

만약 이 스토리에서 민박집 주인이 정육점에 20만원을 빌렸는데 그 돈을 고기를 사먹는 대신 민박집의 시설을 좋게 만드는데 투자를 했다고 가정하자.

  1. 그렇다면 민박집의 자산이 일단 늘것이다.
  2. 여행객은 민박집에 만족하고 숙박을 했을 것이다.
  3. 그렇다면 경제주체의 모든 빚은 청산되고 + 여행객의 20만원이 산골마을 경제에 들어왔을 것이다.
  4. 그렇다면 소득이 20만원 늘어난 민박집은 20만원의 일부를 정육점에 소비했을 것이고
  5. 정육점 주인은 또 소득이 늘어나게 된다. 그럼 세탁비로 또 소비를 늘렸을 것이고…
  6. 이렇게 경제의 선순환이 반복된다.

즉 일반적인 소비를 위해서 빚을 내는 것은 그다지 도움이 안되며

자신의 자산 가치를 늘려 미래 소득을 늘릴 수 있을때 빚을 내는 것이 현명하며 전체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교훈이라 할 수 있다.

인터넷에 떠도는 ‘돈은 돌고 돌아야 돈’이라는 교훈은 바로 이 경우 여행자의 돈이 흘러들어 올 수 있고 그 소득증가로 인한 통화승수 (Money Multiplier)가 생겨나야 진정한 의미의 ‘돈은 돌고 돌아야 돈’ 이라는 표현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국가자본주의 중국 내 공기업 혁신의 필요성

본 블로그는 홍콩과학기술대학교 (Hong Kong University of Science and Technology)의 경제학부 (Economics Department)의 조교수 Wong Yong의 2015년도 발표자료를 토대로 만들었습을 밝힙니다.

논문링크

이 포스트는 2000도 이후 중국의 공기업(State-Owned Enterprises, 이후 SOEs)들의 수익률 증가의 원인을 설명하고 있으며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급격하게 줄어든 SOEs의 수익률과 그 해결책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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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그래프의 왼쪽 축은 기업들의 수익성(Profitability)를 나타내며 오른쪽 축은 중국내총생산 대비 수출 비중을 나타낸다. 수익성(Profitability)은 기업의 수익(Profit) / 매출액 (Sales Revenue) 로 계산되었으며 이는 기업들이 그들의 고객들에게 얼마만큼의 가격인상(Mark-up)을 적용하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래프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2000년도 이전 기업형태의 따른 수익성을 보면 SOEs의 비해 Non-SOEs, 즉 공기업이 아닌 개인기업들,의 수익률이 높은 편이었다. 실제로 이 시기엔 아무도 중국의 공기업에 취직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2000년도를 기준으로 판세가 뒤바뀐 것이 보입니다. 2000년도 이후 SOEs는 비SOEs의 비해 엄청난 속도로 수익률을 축적해왔다.

그 뒤, 2008년도 세계금융위기를 겪은 후 SOEs의 수익성은 급격하게 떨어졌다.

수출트랜드를 살펴보면 (붉은 실선) 2000년도 이후 수출트렌드가 급격히 늘어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수출트렌드는 2000년대 이후 Non-SOEs보다는 SOEs의 수익성 곡선에 더 연관이 되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중국내 수출의 증가의 대부분은 Non-SOEs인 개인기업들이 주도 했으며 SOEs들의 수출 비중은 14%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이 포스트에서는 어째서 수출의 증가가 Non-SOEs보다 SOEs들의 수익성을 더 잘 대변하게 되었는지의 관하여 알아보게 될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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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포춘지 선정 세계 500대 기업중 57개의 기업이 중국기업이었으며 그 중 53개의 기업이 SOEs였고 그 중 대부분이 상위산업(Upstream Industries)에 기여하고 있었다.

상위산업(Upstream Industry)이란?
원자재(Raw Material)를 중간재(Intermediate Products)로 변환시켜 판매하는 산업으로서 하위산업(Downstream Industries)은 이를 받아 완성재(Finished Products)로 변환시켜 판매한다. 상위산업의 예로는 전기와 석유 같은 에너지산업, 금융산업 및 통신사업 등이 있으며 하위산업의 예로는 제조업체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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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패턴은 자유경제시장이 발달한 미국과 프랑스 같은 국가들과 비교했을때 상항히 높은 수치임을 알 수 있다. 미국의 경우 500대 기업 중 3% 만이 SOEs에 속했으며 그 중 14%가 상위산업에 속했다.

 

원인 0. Trade Openness (무역개방)

2001년 중국은 World Trade Organisation, WTO에 가입하게 되며 수출장려정책을 펼치게 된다.

이로인해 중국 내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한 생산산업(하위산업)들의 수출이 활발해졌다.

그리고 이는 하위산업들의 높은 수익률과 경제활동은 상위산업들이 생산하는 중간재의 수요 또한 함께 늘리는 역할을 했다 (원인 1 참조)

 

원인 1. Vertical Structure of Industries (산업의 수직적 구조)

요점 1. 정부정책으로 인하여 상위산업의 대부분은 SOEs가 독점 vs 하위산업의 대부분은 사기업들이 주도

요점 2. 하위산업이 완성재를 만들기 위해서는 상위산업이 생산하는 중간재가 필수적으로 필요

요점 3. 중국의 하위산업 민영화와 무역개방정책의 힘입어 하위산업은 가파르게 성장함 (상위산업의 생산물의 대한 수요증가)

요점 4. 상위산업은 독점력을 이용하여 하위산업들에게 높은 가격(Price Mark-up)을 적용할 수 있음

요점 5. 1999년 이전 Vertical Structure가 형성되기 이전 SOEs와 사기업들은 서로 같은 산업에서 경쟁하는 구도 였으며 그 결과물은 SOEs의 패배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음. 2000년 이후 산업의 소유권이 분리 된 이후부터는 SOEs들은 사기업들이 성장하면 할수록 이득을 얻는 구조가 생기게 됨

1990년대 이전 많은 국영기업(SOEs)들을 소유하고 있던 중국은 기업운영의 효율성면에서 높은 압박을 받으며 1990년대 초반부터 중국정부는 효율성 증대라는 명목하에 SOEs 중 하위산업을 대대적으로 민영화(Privatisation / Liberalisation)하기 시작하였으며 2000년대 초반 이 민영화작업은 거의 완료되어 갔다. 그리고 이는 중국 경제성장의 주 원동력이 된다. 또한 이는 첫번째 그래프에서 1999년도 이전 SOEs들의 수익성이 낮았던 이유를 대변한다.

거대한 SOEs가 빠진 하위산업은 사기업(Private Firms)들이 급격하게 빠른 속도로 채워가기 시작했고 값싼 노동력을 기반으로 한 이들은 수출을 주도하며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는 중국경제성장의 주 동력이 된다.)

또한 하위 산업이 팽창함에 따라 생산규모를 늘리려는 기업들이 많아지고 자연스럽게 그 중간재인 에너지 및 금융 등의 중간재의 대한 수요도 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들이 필요로하는 중간재산업은 대부분이 SOEs이 독점하고 있는 형태이다. 따라서 하위산업이 발전할수록 독점인 상위산업은 하위산업에 더 가격을 올려 받을 수 있는 것.

만약 이런 산업의 수직적인 구조가 없었다면 수익성이 높은 상위산업에 사기업들이 참여하여 경쟁을 유도 했을 것이며 그러한 이유로 중국의 상위산업은 하위산업과 마찬가지로 가격경쟁으로 인하여 SOEs들의 수익률마진이 낮아졌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SOEs는 사기업들의 수익의 일정부분을 독점력을 이용하여 착취해가며 좋은 성적을 유지 할 수 있었다.

몇몇 SOEs 개혁 옹호론자들의 주장은 SOEs는 이미 매우 좋은 성적을 내고 있고 세계 500대기업에 들어가면서 국민적 영웅이 되었으며 많은 세금을 내 중국경제성장에 지대한 기여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SOEs가 어느정도 운영적인 면에서 개혁한 것은 인정하지만 현재의 SOEs의 높은 수익률과 좋은 기업성적은 성장의 결과물일 뿐, 성장의 기여물은 아니다. SOEs는 여전히 사기업들의 비해 낮은 생산성을 보이고 있다.

 

원인 2. Abundant Cheap Labour (값싸고 풍족한 노동력)

중국의 풍족한 노동력은 산업화로 인한 노동자의 임금인상의 속도를 가파르게 줄였다. 그리고 이는 하위산업(즉 제조업이나 서비스기반의 산업)들로 하여금 매출이 늘어나는 것의 비하여 비용이 크게 늘지 않는 즉 수익률이 증가하게 되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이런 하위산업의 수익률성장은 상위산업들의 수익률을 늘려주는 계기가 되었다.

 

원인 3. Structural Change – Industrialisation (경제 구조적 변화 – 산업화)

공업은 농업의 비해 전기/에너지/금융 등 상위산업의 대한 수요가 높다.

때마침 중국에게 불어온 공업화의 바람은 SOEs의 수익률을 높혀주는데 큰 기여를 했다.

 

증거

2008년도 세계금융위기 이후 보이는 SOEs의 수익률 급감이 이를 설명한다.

세계금융위기로 인한 수출급감이 중국내 하위산업을 위축시켰으며 이는 상위산업의 중간재 수요의 위축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하위산업의 성적에 크게 기대고 있던 상위산업의 성적은 휘청거릴 수 밖에 없었다.

 

사회적 영향

  • 현재의 SOEs의 높은 수익률과 좋은 기업성적은 성장의 결과물일 뿐, 성장의 기여물은 아니다. 또한 중국경제성장의 주동력은 사기업들의 활발한 수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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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례없던 SOEs의 번성은 중국의 시장중심경제개혁이 아직 미완성단계라는 것을 반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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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위산업의 SOEs의 독점구조를 방지한다면 중국은 산업화를 촉진시킬 수 있으며, 낮아진 소비자 가격과 향상된 공공복지와 개선된 소득분배 그리고 부정부패 발생비율의 감소로 인하여 GDP는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성장지속 가능성

  1. 중국의 공업화가 지속 (농업 –> 공업), 이는 더 많은 사람들이 농업에서 공업으로 직종을 바꿈을 뜻함
  2. 실질임금의 상승 + 그의 따른 실질환율 상승 (Balassa–Samuelson 효과)
  3. 하위산업의 국제경쟁력 하락
  4. 상위산업의 독점으로 인하여 하위산업의 발목이 잡힘 (독점지속시)
  5. 하위산업의 성장하락으로 인하여 상위산업의 성장도 저하
  6. 상위산업은 독점가격폭을 낮추고 생산성을 늘려야만 함 (중간재의 가격을 낮춰야 함)
    (그래야 하위산업이 살고 상위산업도 그로 인해 살 수 있으니까)
  7. 그렇지 않으면 중국은 중진국의 함정에 빠질 수 있음 (Middle Income Trap)

 

SOEs 개혁 방안

한가지 만능방안은 없다.

산업별로 다른 방법을 도입해야함

급작스러운 변화보다는 완만한 변화

  • Natural Monopoly(자연독점)  vs  Administrative Monopoly(관치독점)
    자연독점이 발생하는 곳에만 SOEs의 독점허용 & 지대추구(Rent-Seeking)을 하는 산업은 규제를 풀어 경쟁유도
  • 전략산업의 개혁
    개발도산시절에는 국가가 주도하는 산업이 유리할 수 있지만 어느정도 수준 이후의 발전단계에서는 선진국형 모델로 규제를 풀어 경쟁을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함
  • 자본축적(Capital Accumulation)과 산업고도화(Industrial Upgrading)
  • 산업정책: 혁신(Innovation) & National Champion
  • 필수개혁분야: (정치적 분야와 법률적 분야의 근대화 시급)
    • 금융개혁
    • 법의 집행 (독점금지법, 감사강화 등)
    • 안전망구축
    • 반부정부패 캠페인 등
  • 최적의 순서 및 개혁 속도:
    • 완만한 변화 (Gradualism)
    • 혼합 소유권 (Mixed Ownership)
    • 해외직접투자 (Outward FDI)